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지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 (문단 편집) == 알비치 가문과의 대립 == 긴급 위원회인 전쟁 위원회의 10인의 일원으로 활약하면서 1429년 루카 시와의 전쟁에 알비치 가문의 지휘 아래에 참전했으며, 알비치 가문의 지휘 아래에서는 피렌체 군대가 이기기 힘들 것이라는 견해를 드러냈다. 전쟁이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1430년 가을에는 불리하면서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하면 안된다는 것과 함께 다른 이들에게도 전쟁 위원회에 참여할 기회를 줄 것으로 주장하면서 피렌체로 떠나 베로나로 갔다.[* 그러나 코지모가 피렌체에 없는 사이에 알비치 가문이 코지모가 엄청난 재산을 이용해 공화국을 침범할 장군을 고용하여 정부를 전복시킬 계획이라는 소문을 퍼뜨렸으며, 이런 소문을 믿은 자도 있었지만 대개 지나치게 성공한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한 구실이라 보았다.] 1432년 가을에는 또다시 피렌체를 떠나 베로나에 가서 무젤로 지방의 일 트레비오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서 수개월간 머무르면서 피렌체 은행에 있는 막대한 재산을 로마와 나폴리 지점으로 신중하게 이동시켰으며, 주화 꾸러미들을 산 미니아토 알 몬테의 [[베네딕토회]] 은둔 [[수도자]]들과 산 마르코의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에게 맡겼다. 무젤로에 머무르고 있을 때 9월 첫째주에 피렌체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아 1433년 9월 4일에 피렌체로 귀환했으며, 알비치 가문이 퍼뜨린 악성 소문 때문에 7일에 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에 갇히자 시뇨리아 궁의 감옥에서 독살 위험을 구실로 식사는 바르디 궁에서 조달받았으며, 경비원 [[페데리고 말라볼티]]는 코지모에게 동정적이라 방문객을 상대로 여러 전언과 뇌물이 오고 갈 수 있었다. 알비치 가문의 [[리날도 델리 알비치]]가 반역죄를 부과하여 사형시키려고 하자 곤팔로니에레 구아다니에게 뇌물로 1,000플로린를 먹여 투표권을 [[마리오토 발도비네티]]에게 위임하게 하자 마리오토에게도 뇌물을 먹였으며, 이러한 뇌물과 함께 무젤로에서 그를 석방시키기 위한 군대가 모집되자 28일에 동생 [[로렌초 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사촌 아베라르도와 함께 재판을 받아 10년간 파도바로 추방된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렇지만 유배 길에서 칭송을 많이 받아 페라라에서 후작 집안의 융숭한 대접을 받거나 파도바에서 권력층으로부터 영빈 대우를 받았으며, 파도바에서 2달간 지내다가 베네치아에 있는 동생 [[로렌초 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와 합류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아 산 지오르지오 마지오레 [[수도원]]에 정착해 도서관 건립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했다. 또한 자신이 위임했던 피렌체의 건축 작업이 잠정적으도 중단되자 베네치아까지 동행한 건축가 [[미켈로초 미켈로치]]에게 건물 설계를 맡겼으며, 베네치아에 머무르면서 피렌체의 정세에 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자세히 들었다. 피렌체에서 알비치 가문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1434년 늦여름 무렵에 밀라노의 용병이 피렌체의 군대를 격파하자 반정부 감정이 격화되면서 1년 만에 유배령이 철회되었으며, 9월 28일에 출발해 베네치아 병사 300명의 호위를 받아 피렌체로 귀환하면서 알비칠 가문을 추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